호그스미드 방문일을 앞두고 눈이 내렸다.
소복히 쌓인 눈 위로 외출에 신난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항상 겨울이 되면 그녀의 필수품이라서 세트처럼 여겨지는 짙은 녹빛의 귀마개를 한 맥고나걸이 필치가 건네주는 확인서를 받아 외출을 나갈 학생들을 살펴봤다.
"귀환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까지입니다. 나가서 사고를 치거나 하는 학생은 영구히 외출을 금지할겁니다. 호그스미드 방문은 굉장한 특권임을 잊지 말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세요."
"네~"
학생들에게 늘 하는 주의를 주고 맥고나걸은 그들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학생들이 저 아래까지 걸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뒤를 돌아서는 맥고나걸의 머리 위로 작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눈이..."
"또 눈이 오는군요. 맥고나걸 교수님."
"그러게 말입니다 필치."
"교수님도 오늘 나가십니까?"
"그럴 예정이에요. 조금 늦을 수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맥고나걸의 말에 다리를 절룩이며 필치가 먼저 학교 안으로 향했다.
맥고나걸은 잠시 분수대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잿빛 하늘에서 하얀 점들이 점점 커지는 것이 보였다.
후우-
하늘을 올려다보는 맥고나걸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하늘로 조금 올라가다 투명해지는 입김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눈송이가 맥고나걸의 차가운 안경에 내려앉았다.
아름다운 모양의 눈송이가 잠시 동안 안경알 위에서 모양을 유지하다가 물방울이 되었다.
장갑 손가락 끝으로 물방울을 닦아낸 맥고나걸은 학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방에 들어와 그새 조금 젖은 망토를 벽난로 주변에 걸쳐두고 나갈 준비를 했다.
평소 학교에서 입고 다니는 옷이 아닌 조금 더 두껍고 색이 어두운 옷을 입고 겉이 잘 젖지 않는 소재로 된 망토를 입은 뒤 귀마개를 바로 하고 모자를 쓰기 전 맥고나걸은 서랍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반지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들고 잠시 아무 말없이 바라보던 맥고나걸은 그것을 끼는 대신 마법으로 만들어낸 체인에 끼워 목에 걸었다.
목걸이가 된 반지를 옷 안에 잘 넣고는 목도리를 하고 모자를 쓴 다음 장갑을 낀 그녀는 벽난로 불을 작게 한 뒤에 방을 나섰다.
맥고나걸이 잠시 방에 들렀던 사이 눈송이는 더 굵어지고 양도 많아졌다.
그 때문에 호그스미드로 가는 길을 학생들이 지나간 발자국 위로 눈이 쌓여 발자국들이 보이지 않았다.
맥고나걸은 굵은 눈송이들이 날리는 길을 망설임 없이 내려갔다.
눈을 마법으로 녹이지 않고 하얀 평원 위에 그대로 발을 디뎌 발자국을 만들었는데 긴 옷자락으로 눈 위를 쓸어 발자국을 지웠다.
바람에 망토가 부풀었다가 뒤로 날렸다.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한손으로 붙잡고 호그스미드와 호그와트의 중간에서 학교를 한 번, 호그스미드를 한 번 바라본 맥고나걸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맥고나걸 교수님이다!"
"어디 어디?"
한편 먼저 나가 허니 듀크에 갔던 해리, 론, 헤르미온느는 따뜻한 가게 안에서 사탕을 우물거리고 있다가 결루가 끼어 하얀 창문 너머로 맥고나걸을 발견했다.
팔짱을 낀 채 홀로 걸어오는 그녀를 본 세 사람은 손으로 결루를 지우고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눈으로 쫓았다.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어디로 가는지 본 것이었다.
항상 호그스미드에 올 때마다 들리는 스리 브룸스틱스로 가는줄 알았는데 맥고나걸은 그곳을 그냥 지나쳐서 걸어갔다.
그에 세 사람의 눈이 커졌고 얼른 허니 듀크를 빠져나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학생들과 교수들이 자주가는 가게들을 지나쳐 몇 없는 주택가를 지나가는 맥고나걸의 발걸음엔 거칠 것이 없었다.
세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고 쫓아가고 있었다.
헤르미온느가 뒤에 남는 발자국들을 지워가며 쫓아갔다.
"하아...."
오래 관리를 안한 것 같은 오두막집 앞에 잠시 멈춘 맥고나걸은 그제야 시선을 들고 집을 올려다봤다.
여기저기 기울고 내려앉은 것이 오래 사람이 살지 않은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세 사람은 그 집에서 좀 떨어진 나무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오늘 외출하는 날이었지 참... 내 정신 좀 보게.'
'미리 나가있는다는 것이... 미안하오.'
'날이 이리 찬데... 아무리 가까워도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다간 감기 걸린단 말이오!'
집을 보고 있자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억 속 목소리, 그녀의 기억이 만든 환청-
휘오오오
오로지 바람이 오두막집의 정원을 쓸고 지나가며 쓸쓸한 소리를 냈다.
바람에 떨어지던 눈송이들도, 쌓여있던 눈송이들도 회오리치며 솟구쳤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오늘은 잘 챙겨 입고 나왔어요..... 앨핀."
맥고나걸은 작게 중얼거리며 집을 바라봤다.
그녀가 짧은 기간 지냈던 곳이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해준, 그녀 역시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곳이었다.
많이 망가지고 무너진 모습이었지만 눈길이 닿는 곳 어디든 그와 함께 했었던, 때때로 찾아와서 며칠씩 지냈던 남동생들의 아이들과 함께 했었던 추억들을 되새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당 한켠에 놓여 있던 테이블과 의자.
그곳에 앉아 조카들이 뛰어노는 것을 봤었다.
솜씨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직접 만든 쿠키와 음료를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놓으면 막내가 제일 먼저 달려와 내 무릎에 매달렸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쿠키를 물려주면 어느새 큰 아이들도 몰려와서 간식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아이를 귀여워하던 앨핀은 아이들과 잘 놀아줘서 인기가 좋았었다.
아이들과 뒤섞여 놀다가 얼굴에 흙을 묻히고 돌아보며 개구지게 씨익 웃는 모습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며 웃었었다.
밤이 되면 마당에 아이들을 앉혀두고 별자리를 일러주며 천문학 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이나 이야기들을 해주기도 하고 불꽃놀이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패트로누스를 불러내서 보여주면 신기해했었다.
그러면서도 만약 그와 일찍 만나 결혼해서 우리 사이의 아이가 있었더라면 그는 참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과 미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앨핀은 그 생각에 지금도 자신은 충분히 행복하다며 그런 생각 말라고 웃으며 말해줬었다.
그래서 더 고맙고 미안했었다는 것을 그는 알까...
조카들이 없는 주말이면 체스판을 가져와 체스를 두며 작게 실랑이를 벌였고 가끔 심각하게 싸우다가 마지막에 누가 이기든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는 것으로 끝났다.
가끔 알버스나 포모나, 필리우스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스리 브룸스틱스의 여주인인 로즈 메르타가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럼 그날 저녁은 알버스가 해주는 웃긴 이야기를 들으며 다들 가벼운 분위기에서 즐겁게 먹고 마셨었다.
울타리 대문 옆 우체통.
우린 마법사라서 부엉이들이 배달해주는데 왜 굳이 우체통을 만드냐는 내 말에 머글들은 집 앞에 다 이것을 설치해두지 않냐면서 가끔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서 그런다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만드는게 영 엉성해서 불안불안하게 보고 있었는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망치로 엄지 손가락을 치고 말았었다.
완성된 결과물은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기울어진 상자였고 대부분의 경우 사용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알버스만은 항상 거기로 편지를 보내서 앨핀은 뿌듯해하며 사용후기가 어떻냐고 물어봤었다.
나는 그가 그럴 때마다 일부러 장난스럽게 불편하다고 말해서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을 봤었다.
사실 알버스 외엔 그것을 처음 본 누구도 우체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내 놀림은 아주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거실 창문 아래 산딸기나무는 어느날 연락도 없이 찾아왔던 리무스가 준 것이었다.
결혼식 때도, 그 다음에 찾아왔을 때도 친구를 잃은 충격에 많이 혼란스럽고 괴로워 보였었다.
그리고 늑대인간이란 것 때문에 그 때까지도 어디에 섞이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안쓰러운 그 아이를 그가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는 어떤 거부감도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그 아이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래서인지 리무스는 1년에 몇 번씩 우리집에 발걸음을 했었다.
올 때마다 작은 선물들을 들고 오더니 한 번은 가을에 어린 산딸기나무 묘목을 가져와서 울타리 대문이 보이는 거실 창문 아래에 직접 심어줬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앨핀의 보살핌 아래 1년만에 엄청나게 번식해서 다음해 여름 커다란 통으로 두통이나 수확할 수 있었다.
한통으로는 앨핀이 술을 담가보겠다며 가져가 술을 만들었고 한통은 교수들과 주변 주민들에게 나눠주고도 많이 남아서 조카들이 먹을 머핀과 과자에 들어가기도 했고 생으로 먹기도 했었다.
리무스도 먹어보고는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길래 네가 작년에 가져온 것이라 했더니 그 침착한 아이가 깜짝 놀라면서 당황하기도 했었다.
그 때 앨핀이 선물을 하고서도 까맣게 잊어버린 거냐면서 리무스를 놀렸고 리무스는 잔뜩 당황해서 그게 벌써 이렇게 자랄 줄은 몰랐다고 했었다.
그 대답에 앨핀은 자랑하듯 다 자신이 잘 키워서 그런거라고 했었다.
익살맞고 장난스러운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왠지 리무스 보기 부끄럽기도 했었지만 리무스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자랑에 맞장구 쳐줬었다.
조카들 앞에서 보여주던 악동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를 못 말린다 생각하면서도 그 다운 것이라며 인정하고 있는 날 발견하고 피식 웃었던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해 앨핀이 담근 산딸기주는 정말 맛이 좋아서 인기가 좋았었다.
그 술은 지인들과 함께했던 새해 첫날 해맞이 때 다 마셨었다.
지인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던 부엌, 동생들과 조카들이랑 모여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거실, 차와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취미생활을 했던 응접실, 내가 과제를 검사하고 시험문제를 내는 것을 도와주던 서재, 하루를 마무리하며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 같이 잠들고 깼던 안방, 부활절, 할로윈, 크리스마스 등 각 시즌 때마다 작은 파티가 열렸던 집 뒷편 정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들이 생생히, 하지만 색이 바랜 듯 따스한 햇빛의 색으로 살아움직이며 무너져가던 오두막집은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울타리 대문에 서있는 자신의 주변을 과거와 똑같은 모습으로 스쳐가는 이들은 유령처럼 투명했지만 환영처럼 손이 닿으면 사라졌다.
손을 뻗으면, 그래서 그 때와 똑같이 말을 하면 돌아올 것만 같은데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보며 맥고나걸은 살짝 들었던 손을 내렸다.
학교가 끝나고 저녁 무렵 집으로 올 때 앨핀은 항상 나를 마중나왔었다.
가끔 마중나오지 않는 날도 있었지만 마중을 나오건 나오지 않건 집 굴뚝 위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연기가 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가 마중을 나오지 않는 날은 몸이 안 좋거나, 바쁜 일이 생겼거나, 무언가에 집중해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있었다거나, 조카들이 왔을 때였다.
그래도 항상 내가 오면 집 밖으로 얼른 나와 반갑게 맞이했었다.
가끔 심심하면 그가 학교로 찾아와서 교정을 같이 거닐기도 하고 학교에서 집까지 같이 걸어오기도 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날이 차면 학교에서 집까지 가까워서 대충 입고 나온 나를 항상 걱정 섞인 말로 타박했다.
그러면 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다음부턴 잘 챙겨입고 오겠다는 말로 그의 걱정을 피했지만 한 번도 그 말을 지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내게 앨핀은 항상 못 말린다고 말하며 고집불통이라고 불렀었다.
다정한 그의 눈동자 안에 섞인 걱정과 어쩔 수 없다는 웃음기가 섞인 작은 체념, 그리고 부드러운 애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타박을 멈추게 하는 법도 잘 알았다.
그의 볼에 살짝, 아주 살짝 입을 맞추고 다음엔 꼭 챙긴다고 하면 잠시 굳었다가 풀리면서 멍한 목소리로 고양이가 아니라 여우라고 중얼거리면서 딱 한 번 마지막으로 꼭 챙기라는 말을 했었다.
그에 항상 나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하며 집으로 같이 들어갔었다.
그렇게 다정했던 그였기에 가만히 멈춰서서 눈발을 맞은 채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당장이라도 달려나올 것만 같은데 그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리움에 젖었던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깊은 어둠에 잠기며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여름날, 노을, 피웅덩이, 힘없이 늘어진 몸.
그를 휘감은 거대한 식물의 줄기, 줄기, 줄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여기저기서 눈물을 찍어내는 하얀 손수건.
파여진 구덩이, 회색의 화강암, 죽은 자를 위로하는 노랫소리...
마지막을 떠올리자 따스한 빛으로 탈색된 추억들은 사라지고 다시 다 쓰러져가는 눈이 쌓인 오두막집이 드러났다.
나이를 먹어 깊이 파인 그녀의 눈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지만 애써 참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맥고나걸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두 손을 꽉 맞잡고 있었다.
"뭐하고 계신거지?"
"쉿! 조용히 해 론."
어깨 위에 하얗게 눈이 쌓인 것이 멀리서도 보일만큼 오래 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맥고나걸을 지켜보던 론이 참지 못하고 작게 묻자 헤르미온느가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충분히 떨어져서 들릴리도 없건만 헤르미온느는 기겁을 하며 단속했다.
헤르미온느에게 발을 밟힌 론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원망스런 눈으로 쏘아봤지만 헤르미온느는 그에게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다.
해리도 헤르미온느도 맥고나걸에게 집중하고 있자 론은 나지막히 구시렁 거리더니 인상을 쓴 채로 두 사람처럼 맥고나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해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맥고나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리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뭔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스쳤다.
맥고나걸은 긴 침묵 끝에 천천히 눈을 떴다.
반쯤 뜬 눈에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이 쌓인 마당이 들어왔다.
장례식 이후 사흘만에 집을 정리하고 호그와트의 방으로 돌아간 뒤로 한 번인가 와보곤 오질 않았던 집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10여년이 흘렀는데도 딱 한 번 왔었던 때와 똑같이 바로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추억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다만 그 때와 다른 점이라면 그 때는 그 추억과 상실의 슬픔을 못 견뎌 도망쳤다는 것이고 지금은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달랐다.
아마도 가장 먼저 쓰러졌을 울타리가 있던 자리를 보던 맥고나걸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눈 속에 묻혀 있음에도 주변과 달리 조금 솟아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쌓인 눈을 손으로 털어내던 맥고나걸은 멈칫했다.
어설프게 못질 되어 있는 투박한 나무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앞에 달려 있었을 문은 어디론가 떨어져 버리고 없었지만 분명 그것은 앨핀이 지난날 만들다 손을 다친 그 우체통이었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 우체통을 들여다보던 맥고나걸은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지팡이를 꺼내들고 일어난 맥고나걸은 허공에 몇 번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세 사람은 그녀가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 갸웃하다가 허름했던 오두막집이 반듯해지고 없던 울타리가 생겨나자 무엇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오두막집을 고치시네?"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도 저기가 교수님이 결혼생활을 했던 곳일거야."
론이 번듯해지는 오두막집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리자 헤르미온느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지금 교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집을 고치고 계신 것일까...'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깊이의 마음의 고통을 헤아리려고 하는 헤르미온느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펴지질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감을 잡을 수 있어도 실제로 얼마만큼을 느끼고 있는지는 조금도 판단할 수 없었다.
맥고나걸이 어디에도 기대려고 하지 않고 홀로 걸어가려는 사람이란 것을 그동안 지켜보며 알았기 때문에 헤르미온느는 그녀가 너무 곧아서 부러져버리는 대나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안에 감춘 채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하는, 강인하다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공평하고 엄격하게 대하면서도 진심으로 부딪치며 다정한 걱정을 아끼지 않는, 하지만 일정한 선을 그은 채 거리를 두려고 하는 맥고나걸의 아픔을 본 지금, 그것을 감히 헤아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대로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아주 단편적인 부분만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감히 내릴 수 없는 판단의 영역이었다.
지금 이렇게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것마저도 죄스럽지만 돌아가기도 애매했기에 계속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맥고나걸은 입김만을 간간히 내뱉으며 기억 속 모습과 똑같이 돌아간 오두막집을 바라봤다.
시선을 내리다가 자신이 서 있어서 닫히지 않은 울타리 대문을 보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문이 닫히고 우체통이 똑바로 섰다.
원래대로 돌아온 집을 말없이 바라보던 맥고나걸은 몸을 돌려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어...! 교수님 가신다!"
"이제 그만 가자... 더 보는 것은 실례..."
"아니."
론이 맥고나걸이 움직이는 것을 알리며 따라가려고 하자 헤르미온느가 얼른 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해리는 그녀의 말을 끊으면서 성큼 맥고나걸의 뒤를 따랐다.
투명망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리의 뒤를 쫓아가는 헤르미온느의 표정은 이해할 수 없다 였지만 해리는 두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오롯이 맥고나걸의 등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대체 왜 그러는거야, 해리!"
"쉿. 조용히 하고 따라와줘. 헤르미온느."
"....하아.... 몰라. 이거 다 너 책임이야."
헤르미온느의 항의에 해리는 손만 뒤로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고 헤르미온느는 작게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착실히 자신들의 발자국을 지워나갔다.
맥고나걸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곳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돌담 너머로 안쪽을 살펴봤다.
눈이 쌓인 안쪽엔 크기가 다양한 돌들이 질서 정연하게 서 있었다.
"여긴...."
"묘지야..."
굳이 가서 확인해보지 않아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장소에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맥고나걸은 종탑에서 서쪽으로 좀 떨어진 작지도 크지도 않은 비석 앞에 섰다.
회색이지만 검은색, 흰색이 섞여 반짝이는 화강암으로 된 뚜껑과 비석 위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이 가리지 않은 부분에 드러난 글자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앨핀스톤 어콰르트 여기 잠들다.'
비석을 잠시 내려다보던 맥고나걸은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비석 위에 쌓인 눈을 손으로 밀어 치우고 가만히 들여다보던 맥고나걸은 지팡이를 꺼내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다알리아 꽃과 리시안셔스 꽃으로 된 꽃다발이 무덤 위로 가볍게 내려 앉았다.
"......그동안 안 와서 미안해요. 이제야 찾아와서..."
호그와트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오지 않았었다.
그가 죽고 기일에는 항상 찾아왔지만 그 외엔 없었다.
찾아와서도 짧은 인사를 한 뒤엔 무언가에 쫓기듯 빨리 자리를 떴었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무덤을 보며 맥고나걸을 지팡이를 도로 넣었다.
한참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하릴없이 입술을 깨물며 말을 하지 못하길 수차례...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터져나오는 입김들이 소리가 되지 못한 그녀의 말을 대신하듯 입 밖으로 나왔다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맞잡고 있던 두 손 중 밑에 있던 손에 주먹을 꽉 쥐며 맥고나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젠... 오래 되어서 그 때를 떠올려도 눈물 같은 건 나오지 않네요."
나직나직한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마저 고요한 묘지에 울렸다.
돌담 너머에서 듣고 있는 세 사람의 귀에도 똑똑히 들리는 그 목소리는 정말로 그 말의 내용과 똑같게도 평소의 것과 같았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난지도 10년이 지났어요. 내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죠. 매일같이 호그와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일상을 말하는 맥고나걸을 세 사람은 숨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굵기를 더해가며 계속해서 내리던 눈마저도 점점 그쳐 이젠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용한 묘지 위로 맥고나걸의 말이 내려앉아 쌓여갔다.
세월에 닳고 닳아, 스스로 무뎌지려 애를 써서 이젠 담담해졌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표현된 감정이 여리게 흔들리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마치 탈색되어 제 빛을 잃은 색 같은 그 감정은 세 사람의 마음에도 차분히 깔렸다.
하지만 하나하나 끄집어져 나오는 감정들이 늘어날수록 내려앉아 쌓이는 감정들은 뾰족해졌고 제 색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뚝 하고 떨어져내린 물방울이 쌓인 눈을 녹이며 자국을 남겼다.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 비석 앞에 정확히, 맥고나걸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 그 자리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방울은 그녀의 눈에서 나온 것이었다.
넘칠 듯 사라질 듯 아슬아슬하게 일렁이는 눈물 탓에 맥고나걸의 눈동자가 이지러져 보였다.
일렁이다가 밀려 떨어진 한 방울이 두 방울이 되고, 결국 그녀는 애써 담담한 척 자기 최면을 걸어왔던 말들을 멈추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눈을 치우느라 얼어붙은 장갑의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맥고나걸을 위해서인지 바람도 불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나.... 계속 도망치고 있었어요. 당신의 죽음으로부터, 당신이 내게 주었던 것들로부터.... 당신과 함께했던 것들을 부정하고 있었어...."
흐느낌 사이로 맥고나걸이 토해내듯 말했다.
무릎을 꿇은 채 앉아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너무나도 약한,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그 모습에 세 사람은 훔쳐보기를 멈추고 돌담 아래에 쭈그리고 앉았다.
가자고 말하는 헤르미온느가 있었지만 해리는 한사코 그자리에 남아있기를 바랬다.
돌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돌담 너머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와 드문드문 섞여 들려오는 발음이 뭉개진 말소리를 들으며 세 사람은 전해오는 깊은 슬픔에 전염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젠 시간이 지났으니 괜찮다고 말하고 살았어요...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당신이 죽었을 때부터 괜찮다고만 말하면서 피했으면서... 필사적으로 당신에 대한 것을 떠올리는 것을 참아왔어요. 그 감정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만 한다.
적어도 그렇게 보여야만 한다.
절대 흔들려선 안 된다.
무너져선 안 된다.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
억지로라도 이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분명히 괜찮아질테니까.
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무뎌지겠지 했던 것은 저러한 생각들뿐...
습관으로 굳어버린 강박관념에 의해 생활을 하면서 점점 지쳐만 갔다.
울컥하고 가끔 치밀어 올라올 때면 한켠으로 미뤄두고 보지 않으려고 했다.
없는 것처럼 취급하려고도 했었다.
애초에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 상처와 수습하지 못한 슬픔과 절망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방치했기에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덧나고 커져서 미뤄둔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그 상처를 마주하는 것이 큰 각오를 필요로 할 만큼 변해있었다.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주하면 무너지게 될까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랬기에 언제나 늘 노심초사, 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기억하지 못한다면, 없던 일이었다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다.
"당신이 나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랬더라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거라고... 조금 아슬아슬하긴 해도 우린 아마 지금도 편안한 친구사이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눈물 젖은 얼굴을 들며 맥고나걸이 입을 열었다.
짙은 후회와 그리움을 드러낸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선명한 감정을 담고 흔들렸다.
"내가 그 전날 들어오다가 그것 때문에 놀라지만 않았더라면 당신이 그것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을 거라고... 날 얼마나 탓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당신을 죽게 만들었던 그것, 베네무스 텐타큘라가 얼마나 싫고 원망스러웠는지 몰라요."
그녀의 말에 섞인 한 단어에 밖에서 듣고 있던 세 사람은 헛바람을 들이쉬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져서 그들의 머리를 한대 세게 치고 가는 깨달음이 있었다.
"모든게 나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당신이 죽었다고 원망했죠. 참 웃기게도 말이에요-"
흐느낌이 남아 흔들리는 목소리로 재밌다는 듯 자조섞인 웃음을 픽 하고 지은 맥고나걸이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애매한 얼굴로 바닥을 봤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던 그 때...
겉으로 완벽하게 연기할 수는 있었지만 혼자 있는 순간이면 완벽한 연기가 깨져 버렸다.
슬픔과 절망과 함께 잃어버린 행복의 빈자리에서 오는 공허라는 감각을 잊기위해, 내일 또 완벽한 자신을 연기하기 위해 억지로 묻어버리려고 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를 질책했다.
앨핀이 죽은 것은 순전히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날 갑자기 일이 생겨 앨핀이 마중을 못 나왔었다.
대문 밖에서 창문 안쪽을 들여다보니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여 오늘은 조용히 들어가 놀래켜주리라 하고 조심조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뭔가가 달려들었고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뽑으면서도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베네무스 텐타큘라란 것을 확인하고 인센디오 주문을 써서 기절시키는데 주문을 비명처럼 내지르고 말았다.
비명같은 주문 소리에 놀라 달려나온 앨핀이 털썩 주저앉은 자신을 부축해 일으켰다.
놀란 자신을 달래느라 앨핀은 그날 저녁 텐타큘라를 제거할 시기를 놓쳤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텐타큘라를 제거할거라고 말하기에 저녁에 학교 다녀오면 같이 하자고 말했었다.
앨핀은 그러겠다고 했지만 왠지 이상하게도 안심이 안 되어 몇 번이고 기다리라고 말하고 출근을 했었다.
그리고 그 날 퇴근을 하고 돌아와보니 일이 벌어져 있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혹시 모를 위험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였는지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저녁 때 학교로 오겠다고 했는데 안 와서 이상하다 생각하며 마을로 내려왔는데 그가 보이질 않았다.
그 순간 아침의 대화가 떠오르고 왠지 모를 불안감에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보니 정원에 피웅덩이가 흥건했다.
여름 저녁이라 길게 늘어진 노을 위로 후덥지근한 공기 탓에 눅눅한 피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피웅덩이와 까맣게 탄 잔디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울타리 안쪽 마당에 힘없이 쓰러진 앨핀의 위로 거대한 식물 형태의 괴물이 두 개가 올라타서 줄기로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빨이 그의 몸에 박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 돼-! 인센디오!'
이상하게도 그 순간엔 굉장히 급박했던 것 같은데 돌아보는 지금은 굉장히 느리게 느껴졌다.
불이 닿자 줄기들을 회수하며 툭하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텐타큘라들을 멀리 차내고 얼른 달려가서 그를 안아들었다.
목을 물어뜯겨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소매로 목을 눌러 지혈하며 집에 항상 두었던 디터니 원액을 아씨오로 가져왔었다.
창백해진 안색과 힘없이 풀리려는 것을 억지로 억지로 부여잡고 있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뭐라고 말을 하려는 앨핀을 막으며 용액을 상처들에 떨겼다.
'....미네.....미네르바...'
'앨핀... 괜찮아요... 그러니까 제발...'
자꾸만 떨려오는 손에 약들이 자꾸 상처 주변으로 떨어졌다.
상처는 아물어가는데 앨핀은 기운을 차리질 못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침착하려고 애를 쓰지만 미친듯 뛰어대는 심장에 자꾸 생각이 멈췄다.
겨우 생각해낸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실천에 옮기려는데 앨핀이 손을 잡아왔다.
파르르 떨리는 차가운 손가락에 잡힌 손을 봤다가 그를 돌아보니 창백한 안색에 마치 바람에 꺼질 촛불처럼 위태로운 얼굴로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그러나 그 생각이 들자마자 부정했다.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되뇌는 내 손을 꼬옥 잡아 다시 자신에게 시선을 맞춘 앨핀은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하기 시작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와 자꾸 새어나가는 목소리가 안타까웠다.
'.....당신이 오기 전에.....끝내려고 했는데.....미안...하오...'
'어째서... 어째서!!! 같이 하자고 했었잖아요...! 내가 하지말라고... 기다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그의 말에 참고 있던 것이 터져버렸다.
화낼 상황이 아니었는데, 적어도 그가 상처가 치료되서 입원해 있을 때에 했었어야 하는데 엉망이 되어버린 사고회로는 평소와 다르게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내보내 버렸다.
내 자신이 왜 화가 나는지, 왜 이러는지도 냉정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자신을 잃어버려서 놓쳐버리고 말았다.
만약 그 때 그 말을 하지 않고 병원으로 데려갔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어쩌면 그는 아직도 내 옆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그랬더라도 그는 죽었을 것이란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탓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면 적어도 그 때 그렇게 그에게 화를 내지 말고 그가 하려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지금 이처럼 후회하진 않을텐데 라는 생각도 했다.
잃어버리는 것이 그토록 두려웠던 소중한 사람인데, 다정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의 말을 더 듣고 그 사람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말을 해줬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순간을 돌아보면 끝없는 후회의 반복이었다.
이런 날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앨핀은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했었다.
대체 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는데 그의 엄지 손가락이 눈물을 닦아내는 순간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안하오... '
'.....앨핀....!'
서서히 감기는 그의 눈을 본 순간 정신이 들었다.
아직 안 된다고,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신을 만나서.....행복했소. 진심으로....사랑ㅎ.....'
곧 꺼져버릴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하던 그의 손이 툭 떨어졌다.
잠시 멍하게 그 모습을 보던 난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봤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오지 않던 말들이 터져 나왔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내리는 눈물과 잔뜩 헝클어져버린 말을 토해내며 절규했다.
그리고 언제 온건지 알 수 없는 알버스와 마을 사람들이 내 주변에 와있었다.
다른 교수들도 뒤이어 도착했었다.
알버스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으로 자신을 알렸고 그 때까지 아무것도 못 알아차린 나는 그를 보고 그에게 매달려버리고 말았다.
내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없이 토닥이는 것으로 달래주던 알버스는 날 대신해서 장례식을 준비했고 다른 사람들도 슬퍼하며 도와줬었다.
그리고 그날 울다가 쓰러져버린 나는 그 후로 장례식 내내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장례식 이후 한동안은 혼자 있을 때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웃다가 결국엔 눈물로 지새운 밤도 많았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하면 할수록 점점 늘어만 가는 후회와 자책에 어느 순간부터 그것마저도 안 하고 외면하고 잊으려하며 지내왔다.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된 말을 하며 무뎌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등 뒤의 어둠을 숨겨왔다.
무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무뎌진 것도 있었지만 그 순간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 또 다른 감정을 생산했다.
그래서 아예 생각을 멈춰버리고 숨기고 묻어버린 뒤 도망쳤다.
스스로에게 자기 최면을 걸며 살아왔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는 것은 감정이나 상처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무뎌지는 것의 배의 속도로 스스로한 거짓말이 무뎌졌다.
닳고 닳고 닳아서 점점 지쳐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엔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정말로 괜찮아진 것이 아니라 매일을 힘겨워하다보니 그것마저 익숙해져 버린 것이었다.
익숙해진 그 고통은 조용히 깊은 곳에 가라앉아 더 이상 힘들게 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불씨 하나에도 터져버리는 위험천만한 폭탄으로 변해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던 맥고나걸의 입이 열리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내가 용감한 사람이라 말했죠. 하지만 난 그저 고집불통에 바보같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제서야.... 이제서야 마주할 각오를 세웠으니까요. 사실 오늘도 쉽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계속 묻어둔다고, 모르는 척한다고, 도망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후회해봤자 나 자신만 더 괴로워질 뿐이란 걸... 그리고 그것을 당신이 바라지 않을 것이란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으니까요."
흐느끼던 어깨가 차분히 가라앉고 흘러넘치던 눈물이 점점 줄어들었다.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세월에 깊이 파여진 주름을 타고 흐르던 눈물방울들을 닦아내는 맥고나걸의 동작은 단정하고 담담했다.
평소의 그녀처럼 의연한 모습으로, 하지만 한층 더 개운한 느낌으로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당신은 항상 나 때문에 행복하다고, 내가 당신에게 주는 것이 많다 말했죠. 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내게 더 큰 행복이었고 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더는 부정하면 안 된다.
행복했던 순간마저, 내가 그토록 되돌리고 싶어하는 그 때 그 시간들을 부정하면 안 된다.
소중하다 말하면서 내 스스로 부정하고 지워버리려는 그런 모순을 더는 만들어선 안 된다.
해리, 론, 헤르미온느, 네빌이 보고 있던 책과 포모나의 이야기에서처럼 언제든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인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언제까지고 눈을 돌리고 숨을 수 없었다.
알버스의 말처럼 한 번은 부딪쳐야 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아마 앞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이 마음을, 이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전과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미네르바.... 후회란 말이오... 덧없는 꿈과 같은 것이오. 수없이 부풀려진 만약이란 가정 속 자신이 원하던 결말을 바라는 것이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 때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때도 이런 결말, 이런 후회를 안 하고 있을까? 아니지.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결말이 나왔다고 해도 또 다른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고 같은 결말이 나왔다면 또 지금과 똑같은 후회를 하고 있었을 것이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란 걸 당신도 아마 잘 알고 있잖소. 후회가 덧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바로 후회를 하는 사람 본인이오. 인정을 안할 뿐이지. 눈을 감고 진짜 봐야할 것을 보지 않고 꿈에 빠져들어 자기자신을 파괴하는 것... 그것이 후회요. 그리고 자신을 파괴하는 길이란 것을 알면서도 후회를 하는 것이 인간이고....'
언제인가 소망의 거울 앞에서 만난 알버스가 해주었던 말이었다.
그 말을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던 어느날에 떠올리고 그제까지 말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납득하지 않았던 것과 지금까지의 자신을 깨달았다.
"......그림자를 떼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 없죠. 그림자가 없는 척 하고 언제나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사는 것은 강한 척 하는 것 뿐이었어요. 진정으로 강하다는 것은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더군요. 남에게 이런 사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더라도 없는 척 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른 거잖아요."
극복했다고 하더라도 아프고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억지로 묻어두고 예민하게 지내다가 누군가가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처럼 우연한 계기로 터져서 감당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았다.
그래서 마주하고 한 번은 제대로 해결을 봐야할 것 같아서 정리하려고 온 것이었다.
다시 떠올리고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무작정 덮어두었던 때보다 훨씬 개운하고 홀가분해졌다.
그동안 고민하며 생각했던 것들도 조금 더 명확해졌다.
무엇보다 지금까진 고통스런 기억이 먼저 떠오르고 그 기억들만 떠올랐다면 이젠 그런 것들보다도 행복했던 기억이 더 떠올랐다.
그 점이 가장 좋았다.
이렇게 돌아가더라도 앞으로 살면서 인간이니까 후회도 할거고 아파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그림자라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그림자로 여길 것이다.
도망치지 않고 받아들이되 지금까지처럼 남에게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모든 것을 남에게 열어 보여야하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까지처럼 자신이 만들어온, 지켜온 이미지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림자를 데리고.
그가 말했던대로 강한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정리하는데 오래 걸려서 미안해요."
깊이 한숨을 내쉰 맥고나걸은 평소처럼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완전히 진정이 된 것인지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호흡마저 차분해진 맥고나걸은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평소의 분위기로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엄격하고 깐깐한 변신술 교수의 모습으로 돌아온 맥고나걸은 한결 밝은 얼굴로 가만히 바람을 맞고 있었다.
돌담 너머에서 한참 말없이 흐느끼는 소리만 듣던 세 사람은 진정이 된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시 일어나 빼꼼히 안을 들여다봤다.
반듯하게 앉아 있는 맥고나걸의 모습이 보이자 세 사람은 각자 물어뜯고 있던 입술과 손톱 등을 바로했다.
"이젠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바로 뜨며 맥고나걸이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더이상 어둠에 잠겨 있지 않았다.
선명하게 맑은 초록빛을 띄는 눈동자가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 위에서 빛을 발했다.
"앞으로도 난 변함없이 지금까지의 내 모습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거에요 앨핀. 당신이 나에게 항상 말해왔던 내 모습으로 말이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에 묻은 눈을 털던 맥고나걸이 빙긋 웃었다.
"이 말 하려고 왔어요. 앞으로 생각나면 자주 들릴게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깨끗해진 모습으로 묘지를 보던 맥고나걸이 아련하게 웃었다.
"정말로 당신이 내게 준 것은 말할 수 없이 많았어요. 조금 더 오래 같이 못한 것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걸요. 하지만 항상 내 곁에 있을 거란 말... 잊지 않았어요."
다정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담긴 밝은 느낌과 진심, 따스함에 섞인 약간의 서글픔이 더더욱 듣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애틋하게 했다.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는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 언저리가 따끔하면서도 뭉클했다.
"행복했어요. 항상 고마웠고 사랑합니다. 앨핀. 나중에 또 올게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10여년 전 그날 했었어야 한다고 매일 후회했던 말을 마지막 인사로 건네며 맥고나걸은 천천히 돌아섰다.
10여년을 품어왔었던 짐을 풀어낸 맥고나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묘지를 나섰다.
많이 덜어냈다고 하더라도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뒤로 물러서거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네르바 맥고나걸이란 사람은 고지식하고 강단이 있으면서도 고집도 있고 꿋꿋한 사람이었고 타인에게 엄격하고 깐깐한 만큼 자기 자신에게는 더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랬기에 지금처럼 고통을 마주하러 온 것이리라.
인간이기에 10여년이란 시간을 끌었지만 언젠가는 꼭 이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를 실행에 옮긴 그녀는 이제 전보다 더 의연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었다.
마치 눈보라 치듯 내리던 눈이 맥고나걸이 묘지에 있는 동안 멎었다가 그녀가 다시 나서는 순간 또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람도 없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차분하게 내리는 눈은 마치 따뜻하게 그녀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소록소록 소리도 없이 쌓여가는 눈 위로 걸어가는 맥고나걸의 등을 보던 세 사람은 그녀의 등에서 망설임이나 미련 등이 보이지 않았고 뒷모습이 평소보다도 더 커보인다고 생각했다.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다가 오두막집 앞을 지나며 잠시 멈췄던 맥고나걸은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알버스... 설마 오늘도 늦지는 않겠지?"
한 잔 하기로 했었던 약속을 떠올리며 맥고나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은 과거 그 사건이 있기 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지인들과 모임이 있어서 나가던 때의 장난스럽기도 하고 신이 난 것도 같은 그 모습과...
맥고나걸이 사라지자 해리는 얼른 투명망토를 벗었다.
그리고는 묘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헤르미온느와 론이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맥고나걸이 앉아 있던 자리가 그대로 남은 비석 앞에 선 해리는 지팡이를 꺼내 마법으로로 꽃을 만들어냈다.
하얀 안개꽃 다발을 내려놓고는 가만히 비석을 보고 있었다.
헤르미온느와 론은 이걸 위해서 해리가 안 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해리가 안개꽃을 내려놓자 둘도 서둘러서 하얀색의 꽃들을 만들어서 내려놨다.
'.....교수님도 소중한 가족을 잃어버리셨었어. 그리고 그 슬픔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계셨고... 하지만 오늘 이겨내셨지.'
맥고나걸의 약한 모습을 처음 봤다.
놀랍기도 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말했듯이 누구에게나 그림자는 있는 법이었고 해리 역시 그녀와 비슷한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각자가 가진 그림자는 남이 판단할 것이 아니었다.
눈으로 보이거나 짐작할 수 있는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당사자 본인에 따라 크기가 다른 것이었다.
그렇기에 함부로 손을 대서도, 알아내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알더라도 모르는 척, 보고서도 못 본 척 해야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한 가지쯤은 있다는 것을 루핀은 지난번에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알아버렸고 보이기 원하지 않을 모습과 가슴 깊이 묻어두었을 비밀까지 다 보고 들어버리고 말았다.
"이 일은 못 본 거로 하자. 모르는 일로...."
"그래."
해리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왠지 맥고나걸이 보여준 모습에서 그리핀도르의 자세를 본 것도 같았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그림자를 없애려고 하거나 없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진실로 이럴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일테니까.
*******
"미네르바."
"왜요 앨핀?"
결혼한지 1년이 좀 지났을 무렵 여름방학 중 어느 햇살 좋은날
집 뒤편 정원에 앉아 책을 보던 맥고나걸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흰색, 연분홍색, 연보라색, 보라색의 아름답고 소담한 꽃들로 이루어진 꽃다발이었다.
예상치 못한 꽃다발에 놀란 맥고나걸의 눈이 커졌고 그에 앨핀스톤은 크게 웃었다.
"갑자기 무슨 꽃을..."
"오늘이 결혼 1주년이란 거. 몰랐소?"
".....아...."
앨핀스톤의 말에 며칠 전 결혼 기념일이 얼마 안 남은 것을 달력에서 본 것이 떠오른 맥고나걸은 놀란 얼굴을 했다.
"이런... 오늘이란 걸 깜빡했네..."
"괜찮소. 그 덕에 이런 깜짝 이벤트도 해보게 되었으니 말이오."
자신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사람 좋은 얼굴로 껄껄 웃는 앨핀스톤을 보던 맥고나걸은 꽃다발로 눈을 돌렸다.
낯이 익은 이 꽃은 분명...
"리시안셔스... 앨핀. 당신은 이 꽃을 참 좋아하나봐요."
"응?"
"결혼 전에 자주 선물하기도 하고 부케로도 썼으면서 오늘도 주는 걸 보니..."
"음... 좀 별로인가?"
"아니요. 향도 괜찮고 색도 예뻐서 좋아요. 그러고보니... 당신이 처음 내게 준 꽃인 프리지아도 향이 굉장히 좋았었는데... 당신 취향은 향이 좋은 꽃인가봐요?"
"당신한테 주고 싶은 꽃을 고르다 보니 자연히 향기가 좋은 꽃이 골라진 것 뿐이오. 당신은 향수를 안 쓰니까... 그리고 향기보다도 사실 더 우선한 것이 있는데 아직도 모르겠소?"
웃으며 그가 늘 하던 꽃선물의 공통점을 이야기 하자 앨핀스톤은 약간 서운하단 듯 말했다.
그에 맥고나걸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게 뭔데요..?"
"하아... 정말이지... 보통 꽃다발을 선물하면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있잖소."
"가장 먼저 보는 것...? 으음... 아 설마... 꽃말...?"
"그렇소. 프리지아의 경우엔 꽃말 때문이 아니라 그 때 가장 예쁜 꽃이기도 하고 정말 향이 좋아 고른 것이기도 하지만... 꽃말인 순결, 시작, 천진난만함, 순진한 마음이 나쁘지 않아서 선택했던 것이고 이 리시안셔스의 경우엔..."
".....변치 않는 사랑..."
"맞았소.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자 항상 가지고 있는 마음, 주고 싶은 것이지."
리시안셔스의 꽃말을 멍하니 중얼거린 맥고나걸이 웃음끼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앨핀스톤을 돌아봤다.
결혼 전과 조금도 차이없는, 아니 전보다 더 진해진 다정하고 진지한 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 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숨김없는 그의 애정에 맥고나걸은 볼을 붉히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왠지 똑바로 마주보기가 불편해 시선을 돌리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꽃에 다 담았소. 대답을 해줬으면 하는데?"
".....대답... 꼭 해야해요?"
"음... 말로 못하겠다면 나처럼 꽃으로 해도 좋고..."
능청스런 그의 말에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살짝 흘겨보자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미 그녀의 모든 반응을 예상했다는 그의 태도에 맥고나걸은 토라지려다가도 그가 전한 진심에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좋아서 마음껏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자연스럽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멈추는 것으로 토라지는 것을 대신했다.
그녀가 입꼬리도 안 올리고 무표정하게 있자 앨핀스톤은 화가 난 것이냐면서 물었고 그녀는 흥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대답을 안 해주겠다는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옆에서 계속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 사소한 싸움의 승자는 앨핀스톤이었다.
옆에서 눈을 빛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자니 대답해줄 때까지 졸졸 따라다닐 것만 같아 맥고나걸은 할 수 없이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더구나 오늘은 결혼 기념일이었으니까 조금 더 아량을 베풀어도 나쁘지 않다고 애써 합리화했다.
그런데 왠지 말로 하든, 꽃으로 전하든 낯부끄러울 것은 똑같을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맥고나걸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짧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짧은 키스 후에 찾아온 어색한 적막에 맥고나걸은 얼른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며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했고 앨핀스톤은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더 정확한 대답을 해달라고 했다.
거의 반 조르는 식의 그의 말을 들으며 거실 창가에 놓인 꽃병에 꽃다발의 꽃들을 꽂으며 내가 어째서 그런 짓을 한걸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맥고나걸은 그가 아직도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휙하고 그를 돌아봤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앨핀스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 얼굴을 보면서 이건 뭔가 억울하다고 얼굴이 아직도 붉은 맥고나걸은 생각했다.
"난 당신 대답을 정확히 듣고 싶은데 말이오?"
"......나중에... 나중에 해준다니까요..."
"부끄러운 것이오?"
"앨핀...!!!"
자꾸만 놀리듯 말하는 그의 말에 버럭하자 앨핀스톤은 그녀를 꼬옥 끌어안으며 웃었다.
얼굴만 빨개지지 않았다 뿐이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그 행동을 통해 안 맥고나걸은 가만히 안겨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맞물려 기분 좋게 들렸던 그 순간이 끝나고 나서도 앨핀스톤은 대답을 듣고 싶다고 졸랐지만 들을 수 없었다.
맥고나걸이 그에 대한 대답을 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어했던 사람이 곁에서 사라지고도 오랜 시간이 흘러 그녀답게 살아가려고 한 발 내딛던 날, 비로소 그녀는 그에게 대답을 했다.
그가 그녀에게 항상 주었던 리시안셔스와 함께 붉은 다알리아를 건네는 것으로...
다알리아의 꽃말은 감사, 당신의 마음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