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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하늘솔

* 간만에 연성해보겠다고 했는데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 제 캐해석 대로 제 입맛대로 썼습니다. 안 맞으실 수도 있으니 그런 분들은 뒤로 가기 를 누르는 것을 권장합니다. 특히 백합 싫어하는 분들요.

* 크로스오버 소설로 영화 「악녀」 「미옥」 「타짜」 의 등장 인물들이 나올 예정입니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의 인물들도 추가될 가능성 있습니다.

* 영화 원작에서 제가 조금 바꾼 설정도 있고 시간 축을 좀 비틀기도 했습니다. 네...

* 일단 악녀의 경우 영화 이후 시점으로 숙희는 경찰에게 결국 붙잡혔는데 권숙이 자신이 보호하는 조건으로 해서 비밀 조직 소속 킬러 겸 교관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그래서 같이 살게 된지 2년 여가 지났다는 설정입니다.

* 수위...는 뭐. 기대하진 마시고. 분량도 제 상태따라 다를 예정입니다.

* 커플링... 쓰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쓰면서 엮어야지.


----------------------------------


"너는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랐는데..."

왜인지 숙희의 머릿속엔 예전 녹음본에서 들었던 숙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짙은 감정과 기억이 묻어났던 그 목소리가...


*


오늘 아침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였다. 적어도 그 날 이후 숙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며 생활한 이후로는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얼마 전부터 아슬아슬한, 뭔가가 바뀔 듯한 기류가 흘렀기 때문이다. 물론 며칠 전엔 그런 기류가 뚝 끊기고 평소와 같아졌지만 이렇게 오늘을 맞으니 그 기류들이 오늘을 예고하는 바람이었음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준비를 좀 더 단단히 해두도록 해."

간단하지만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 식탁 앞에서 말하는 숙이 입고 있는 셔츠는 어제 입고 나갔던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과 더불어 풍겨오는 옅은 알코올 향에 숙희는 다시금 숙의 얼굴을 살폈다.

밤을 샌 듯 깊게 파인 눈가와 흐트러진 머리카락, 심란함을 숨기지 못한 어두운 안색까지. 그간 숙희가 봐온 숙의 모습들 중에서 가장 빈틈이 많은 모습이었다. 식욕이 없는 듯 찬물만 조금 마시고 이마를 짚는 모습에 숙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숙취 해소제와 두통약을 찾아왔다.

"알았으니 단장님부터 챙기세요. 지금은 지나가던 어린애도 쉽게 이기겠네요."
"...... 그래."

긴 텀을 두고 답한 숙이 숙희가 건넨 약을 챙겨 입에 털어넣었다. 그런 숙을 관찰하듯 살피며 숙희는 제 몫의 토스트에 딸기쨈을 발라 한입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간만에 호기심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며 숙희는 어쩌면 오늘 보게 될 일에서 자신이 몰랐던 숙의 일면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작게 떨었다. 그간 숙과 함께 지내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겉으로 보여주던 모습과 달리 혼자 무너지는 것을 우연치 않게 발견했었다. 물론 지금처럼 넋이 나간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런 숙희를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라면 귀신 같이 알았을 숙은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대로 두면 빈속으로 나갈 기세기에 숙희는 한숨을 쉬며 숙을 일으켜 세웠다. 의아한 기색으로 저를 보는 숙의 등을 떠밀어 욕실로 향하며 숙희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러다간 준비도 못 하고 나가겠네. 몇 시까지 나가야 하는 거에요?"
"오후 2시."
"서둘러요. 저도 준비해야 하니까."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닫아버린 숙희를 돌아보던 숙은 고개를 돌렸다가 욕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들고 옷을 벗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찬물이 비처럼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로 들어서는 숙의 몸엔 크고 작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마치 차가운 물에 상념이 씻겨 나가길 바라듯 한참 물을 맞으며 서 있던 숙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빠른 손길로 씻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의 시간에 비해 현저히 적은 시간 안에 씻고 걸어둔 수건으로 몸을 닦다가 거울을 본 숙은 제 가슴 부근의 짙고 큰 흉터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이어 허벅지의 붉은 흉터 역시 쓸어보고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뭔가가 울컥 솟구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숙의 얼굴 위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갔다.

똑똑-

"다 씻었어요 단장?"
"..... 어. 나가."

그때 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에 욕실을 가득 채웠던 기묘한 기류가 깨졌다. 숙은 얼른 거울에서 시선을 돌리며 가운을 잡아 걸쳤다. 허리끈으로 앞을 여미고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덮은 채 문을 여니 숙희가 서 있었다. 그에 얼른 자리를 비켜주듯 숙이 욕실에서 나오자 숙희는 씻고 나온 숙을 한 번 살폈다.

"... 왜."
"아뇨. 옷은 늘 입으시던 대로 준비해뒀어요."
"...."
"어째 오늘은 영 딴 사람 같으시네요 단장."

그 말을 끝으로 욕실로 들어간 숙희가 문을 닫았다. 숙은 그런 숙희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방으로 향했다. 화장대 옆 옷걸이에 걸린 하얀 셔츠와 검정 바지, 그리고 자켓. 평소 입던 것과 큰 차이는 없는 옷가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숙은 화장대 앞에 앉았다.

'나는 오늘 과연 널 마주하고도 평소 같을 수 있을까.'

작은 흔들림이 이는 눈동자가 거울 속에서 숙을 향하고 있었다. 이내 거울 속 얼굴의 입술이 움직여 자조적인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럴리가.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에 숙은 시선을 내려 화장품을 집어들었다.

"... 그래도 미룰 수 없어."

해내는 것 외엔 다른 답은 없어.

느릿한,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가 나직히 울리고 상념을 끊어내는 듯 망설임 없는 손길이 연신 화장품을 찍어 얼굴에 발랐다. 무엇인가를 숨기듯 평소보다 공을 들여 화장을 한 숙은 가운을 벗고 특수 제작한 방검 조끼를 착용했다. 그리고 그 위로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하나씩 걸쳤다. 단추 하나를 잠그는 손동작에도 무언가 결의가 차있어 어딘가 경건한 모습이었다.

느릿하지만 꼼꼼하게 옷 사이사이 무장을 한 숙이 마지막으로 자켓 위에 코트를 걸치자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역시나 준비를 마친 듯한 모습의 숙희가 이동식 집 전화를 들고 들어왔다. 살짝 굳은 표정을 보아하니 상부인 모양이다. 작게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전화를 받아든 숙은 장롱 문을 열고 뒤적이며 수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들었다.

"... 알겠습니다. 다녀와서 처리하도록 하죠."

10분여의 통화 끝에 숙은 간결한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눈치를 보듯 방문 근처에 서있던 숙희가 얼른 다가와 전화기를 받았다. 숙은 전화기를 건네주고 장롱에서 커다란 가방 하나를 꺼냈다.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숙희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거 차에 싣고... 아무래도 오늘 외출 이후에 계획은 전면 수정되어야 할 거 같다."
"하아. 저도 그럼 챙겨가야 하나요?"
"필요한 건 챙겨야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동행은..."
"일단 오늘 일정엔 나와 너, 그리고 애들 둘 정도. 볼일이 끝나고 지금 들어온 일엔 몇 더 합류할거야. 그건 나중 일이고. 얼른 챙겨서 나와."
"네-"

숙이 건넨 가방을 챙겨든 숙희가 방을 나서고 숙은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문자 몇 통을 보냈다. 그리고 방을 나서려다 멈칫하더니 걸음을 돌려 화장대 서랍을 열고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고민하듯 한참 들여다 보던 숙은 이내 결심한 듯 그것을 손목 안쪽과 옷깃에 뿌렸다. 병을 넣고 손목 안쪽을 목덜미에 톡톡 두드리자 향이 코로 들어와 숙은 잠시 멈칫했다.

'... 선물.'

무심한 듯한 목소리가 떠올라 입술을 깨문 숙은 그 잔상을 떨쳐내듯 코트 자락을 털며 밖으로 나갔다. 짐을 챙겨든 숙희를 보고는 그대로 집을 나서는 숙의 걸음이 빨랐다. 평소처럼 숙희가 뒤따름에도 별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숙희 역시 냉정한 얼굴로 그 옆에 섰다. 두 사람이 지하에 도착하니 썬팅이 된 검은 차가 시동이 걸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차의 뒷좌석에 숙과 숙희가 올라타자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차를 출발시켰다. 밖으로 나서자 환한 빛이 쏟아져 인상을 썼던 숙은 어느 새 화사하게 변한 나무들에 잠시 멍해졌다.

그녀가 인지하지 못한 새에 어느 덧 봄이 도래해 있었다. 하는 일이 일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세월에 무뎌져버린 탓인지. 일 때문이 아니라면 계절 변화를 신경쓰지 않았던 숙은 갑작스레 마주한 따뜻해진, 어딘가 달콤한 것도 같은 공기에 속이 울렁이는 것만 같았다.

한편 같은 차 안에 있던 숙희는 평소 맡지 못한 향이 차 안에서 나자 그 원인을 찾다가 숙에게서 난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향수라도 뿌린 건가. 아까는 나지 않았는데. 숙이 뿌릴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향에 잠시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은 숙희였다. 뭐라 물어볼까 싶다가 고개를 저은 숙희는 제 상사의 이상한 변화를 머릿속으로 혼자 잘 조합해 보기로 했다.
Posted by 설하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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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닥터 김사부 드림

 

그들의 첫 만남 - 한결의 돌담 도착

 


 

이른 아침 돌담 병원의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대치 아닌 대치를 하고 있었다.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어떤 이들이냐면 스테이션 안쪽의 푸른빛 간호사복을 입은 수쌤 오명심 선생을 필두로 한 돌담 병원의 간호사진과 바깥쪽에서 그들을 보고 선 베이지색의 간호사복을 입은 거대 병원 파견 간호사진이었다. 각 대표는 서로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어도 그 뒤에 사람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 중간에서 불꽃이 튈 것만 같았다. 폭풍이 몰아치는 것만 같은 조용한 병원 복도에 대치를 끝낼 소리가 들려왔다.

 

지원 파견 첫 날부터 뭣들 하고 있는 거예요?”

“...! 서 선생님.”

 

복도 끝 벽에 기대 서 있던 가녀린 인영이 몸을 바로 하더니 스테이션 쪽으로 걸어왔다. 이른 아침의 조용하고 청명한 공기 중으로 또각또각 하는 맑은 발소리만이 도도하게 울렸다. 빛을 등진 탓에 그림자 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돌담 간호사들은 궁금함을 가득 담고 새로운 사람을 바라봤다. 그가 얼굴이 똑바로 보일 정도의 거리가 되어 걸음을 멈추자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힌 수쌤의 한쪽 눈썹이 까딱하고 위로 올라갔다.

그와 반대되게 거대 간호사들의 대표로 말하던 지 간호사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가까이 다가온 인영을 보며 뭐라 말해야할지 몰라 시선을 바삐 움직이던 그녀는 자신이 파견오기 전 들었던 이야기들 중 빠뜨린 것이 있는지 떠올리느라 생각에 빠져 있었고 나머지 간호사들 역시 놀란 기색이 비쳤다. 그런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본 인영은 눈을 깜박이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뒤늦게 여기 지원 오겠다고 도 원장님께 말씀 드렸어요. 그러니 원래 지원 멤버에 없었던 것이 당연하니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요.”

“... , 그러셨군요. 그런데 서 선생님은 왜 이런 시골 병원에 오신 건가요?”

지원 나온 선생님들, 외과와 응급의학과 담당이신 분들 뿐이잖아요? 그런데 이곳에 외과의들만 필요하단 생각은 안 들거든요. 그 뿐이에요.”

 

마치 이론을 말하듯 망설임 없이 시원시원하게 나오는 명료한 말에 수쌤의 눈동자에 옅은 흥미가 어렸다. 창백하다 싶은 하얀 낯빛 위로 흐르는 새벽 같은 서늘한 분위기를 가진, 의사로 추정되는 젊은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며 수쌤은 이번 파견 인원에 대한 생각 중 일부에 대해 수정의 가능성을 달았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듣고 말았어요. 과민한 것인가 싶은데 쓸데없이 경쟁의식을 불태우면서 문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알겠습니다.”

우리가 여기 내려온 목적은 분원에 부족한 의료진에 대한 지원 목적이란 걸 잊지 말아주세요. 부탁할게요, 다들.”

 

어떻게 보면 순진하다 싶은 그녀의 말에 수쌤은 시선을 옮겨 지 간호사를 바라봤다.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인 지 간호사를 보던 수쌤의 눈에 묘한 감정이 잠시 섞일 때, 수쌤 뒤에 서 있던 다른 간호사들의 입술은 웃음을 눌러 참기 위해 바들거리고 있었다.

거대 간호사들에게 할 말을 끝낸 그녀는 그대로 시선을 돌려 돌담 간호사들을 향했다. 무심한 듯, 무료한 듯 고요한 검은 눈동자가 자신들을 향하자 수쌤을 제외한 간호사들은 얼른 표정을 바로 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팔랑이는 것을 보던 수쌤은 호의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어서 오세요. 돌담 병원 수간호사 오명심입니다. 거대 병원에서 지원 나오셨다고요?”

. 인사가 늦었습니다. 내과 전문의 서한결입니다.”

내과. 우리 병원에 부족한 분야네요.”

그럴 것 같았어요.”

 

대답과 함께 아주 조금 올라간 입꼬리가 만든 미소에 수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서늘하고 무심한 느낌을 주던 창백하다 싶은 하얀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어리자 인형에서 사람이 된 양 온기가 흘러넘치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새삼스레 한결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모두였다.

갸름한 얼굴선에 평균 이상의 키와 호리호리하고 여린 느낌을 주는 마른 몸은 반듯한 자세로 약하단 인상을 주진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옅은 존재감은 그녀에게서 풍기는 옅은 향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형성했고 그 묘한 분위기는 자세히 뜯어보면 상당한 미형임이 틀림없을 얼굴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켰다. 약간 부스스한 것도 같은 웨이브 진 검은색의 긴 머리를 풀어놓은 한결에게선 다소 피곤한 느낌이 짙게 묻어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큰 눈의 아래에 자리한 다크써클이 제법 짙었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에 피로가 보이자 수쌤은 약간의 걱정을 담아 물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요?”

? , 어제 야근하고 새벽에 바로 내려오느라 그래요. 간만에 운전을 좀 해서.”

 

한결은 콧잔등에 작게 주름을 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좀 찌푸렸다. 수쌤은 그런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쉴 시간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 거대 간호사들과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벌인 탓일까, 그런 그녀들에게 바른 말을 한 한결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간 상태였기에 다소 평소보다 더 친절했다.

 

그렇군요. 저쪽 문으로 나가면 의국이 나와요. 거기에서 조금 쉬다가 원장님께 인사드리는 것이 어떤가요.”

“... . 그래도 될까요?”

. 원장님이랑 다른 분들 오시면 알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조금만 쉬다가 올게요.”

 

한결은 저를 보는 수쌤에게서 느껴지는 호의에 살짝 목례를 해보이고는 의국으로 향했다. 피곤으로 인해 머리가 멍한 것과 별개로 예민하게 날이 선 말투가 둥글어진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침의 일에 대한 인상이 각자의 느낌대로 아로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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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설하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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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 Pro ætérnus Desiderium

1부
Altiora Petamus & Dame un Beso Para Siempre
(더 높은 곳을 찾게 하소서 & 영원히 키스해 주세요)






1937년 경성

화려한 밤의 거리 중 가장 번화한 곳이 있다.
인기 댄서 로라가 활동하고 있는 구락부가 바로 그곳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붉은 밤(赤夜)이라 불리는 구락부의 지하 무대 앞은 오늘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흔한 홀의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사는 이들이지만 대다수가 일본인이었고 간간이 한국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들 거기서 거기인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은 홀 여기저기 놓인 계단 위 따로 마련된 자리에서 마시고 즐기는 것이었다.

홀 한켠에 마련된 무대에선 연신 흥겨운 음악소리가 울리고 여러 팀의 댄서들과 가수들이 나와 공연을 했다.
공연을 보며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고 웃음을 터트렸다.
상류층이라 자부하는, 소위 선진문물을 접해봤다 하는 치들이 모여 노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혀 꼬부라진 외국어로 불리는 노래가 잔잔히 흘렀고 사람들의 기대감은 시간이 자정을 향해가면 갈수록 점점 더 높아졌다.

그리고 드디어 자정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울리자 구락부의 직원들이 사람들을 적당한 거리로 밀어냈다.
순순히 직원들이 제지한 선 너머로 물러난 사람들이 일제히 외쳐대기 시작했다.

"로라!"
"로라!"
"로라!"

모두의 입에서 한마음으로 외쳐지는 이름에 조명이 꺼지고 신나는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항상 호흡을 맞춘 4명의 남자 댄서들 뒤로 나타난 검은 턱시도의 여자에 사람들은 미친 듯 환호하기 시작했다.
빠른 템포의 흥겨운 음악에 맞춰 빠르고 격렬한 춤을 선보이는 '로라와 모던보이즈'를 보며 사람들은 열광했다.

후끈 달아오른 듯한 홀을 태연히 내려다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붉은색의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계단 위쪽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물끄러미 무대를 바라보며 담배가 든 긴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단발의 여인 곁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서있었다.
발목 어림까지 오는 붉은 차이나 드레스의 트인 옆을 따라 하얀 허벅지와 종아리가 드러났다.
차이나 드레스의 가장자리엔 금색 실로 정교한 문양이 과하지 않게 들어가 있었다.
붉은색 구두를 신은 발을 까딱이며 곰방대를 입에 문 여인의 눈은 쉽사리 알아챌 수 없는 깊은 감정들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타고나길 뽀얀 피부가 어둑한 구락부의 주황색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붉은 입술은 요염함을 더하였지만 무료한 듯한 표정 탓에 색기보다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예쁘네."

물고 있던 곰방대를 뒤집어 털며 무심하게 중얼거린 여자는 공연이 끝나고 로라와 모던보이즈가 무대 안쪽으로 사라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 한켠에 걸쳐둔 붉은 드레스에 대비되는 짙은 녹빛의 털로 가장자리가 장식된 숄을 두른 여자는 홀에서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차가운 눈으로 일별한 후 계단을 올랐다.
또각거리는 여자의 구두굽 소리 뒤로 남자들의 뚜벅이는 소리가 조명이 적어 어둑한 복도를 울렸다.
어둑한 복도를 지나 구락부의 술과 음식들이 저장된 창고를 지난 여자의 거침없는 발걸음이 향한 곳은 무대 뒤쪽 분장실이었다.
분장실 중에서도 가장 안쪽의 개인 분장실 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어젖힌 여자는 자기를 따라온 남자들을 문 밖에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섰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양쪽으로 열리는 커다란 나무문이 닫히고 조금 전까지 도도한 얼굴이던 여자가 곰방대를 집어던지곤 성큼성큼 안에 있던 로라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두 볼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로라 역시 그 갑작스런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고 여자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작은 웃음소리와 쪽쪽 거리는 가벼운 소리들이 둘 사이를 메꾸다가 화장대 너머 한켠에 마련된 등받이 없는 긴 소파에 둘이 풀썩하고 쓰러지고 나서야 사라졌다.
둘이 소파 위로 쓰러지는 서슬에 분장실 내부 여기저기 어지럽게 걸려 있던 옷가지의 천들이 위로 하늘하늘 흩날렸다가 느리게 떨어져 내렸다.

"오늘도 예뻤어."
"그래?"
"응. 멋지다는 게 더 어울리려나?"
"고마워. 마담."

가쁜 숨이 섞인 작은 목소리에 로라가 눈을 휘어 웃으며 자기 위에 엎드린 여자를 올려다 봤다.
마담이라는 호칭에 작게 인상을 쓴 여자가 로라의 볼을 살이 비치게 투명한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살짝 꼬집었다.

"또 그런다. 내가 로라라고 불러주길 바래?"
"여기서야 그렇게 불러주는 게 맞지 않겠어, 마담?"
"이럴거야?"

계속되는 능청스런 로라의 말에 여자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토라질 기미를 보였다.
그에 로라는 웃음을 터트리며 여자의 허리를 안더니 몸을 굴려 서로 마주보고 소파 위에 눕게 만들었다.

"알았어. 예림아."
"자꾸 그러면 난실이 너... 용돈 안 준다?"
"아아~ 잘못했어."

마담이라 불리던 여자, 예림의 말에 로라-난실은 얼른 웃는 낯으로 예림을 끌어안았다.
막 격한 무대를 끝마치고 왔기 때문인지 잔뜩 달아오른 체온과 빠른 심장박동이 느껴지자 예림은 삐친 척 하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손을 들어 난실을 마주 안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가만히 안고만 있던 두 사람은 난실의 심장이 평소의 속도를 찾자 천천히 서로를 품에서 놓고 가벼운 입맞춤을 몇 번 나누었다.

"이제 어디로 갈거야?"
"가게 나가봐야지."
"흐응~"

자리에서 일어난 난실이 무대에 오르며 입었던 옷을 벗고 평범한 양장으로 갈아입는 것을 소파에 앉은 채 보던 예림은 발끝을 까딱거리며 담배에 또 다시 불을 붙였다.
하얀 셔츠에 짙은 남색의 바지를 입고 같은 색의 자켓을 걸치고 돌아서던 난실은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는 예림을 보다 저도 담배를 꺼내 물고 다가가 예림의 담배 끝과 자신의 담배 끝을 맞댔다.
담배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변화가 없는 예림의 눈과 달리 난실은 가벼운 눈웃음을 보인 후 떨어졌다.

"그래서 이번엔 어디 안 가?"

난실이 연기를 뱉는 것을 보던 예림이 입을 열었다.
난실의 신분이 단지 이 구락부의 인기 댄서, 삼송양장의 재단사가 아니라 독립운동가 라는 것을 알고 있는 예림의 질문에 난실을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응. 당분간은 경성에 있을거야."

네 곁에 말이지.

난실의 대답에 그래? 하고 고개를 숙이던 예림의 귓가에 속삭인 난실이 숙이고 있던 몸을 세우며 담배를 도로 입에 물고는 모자를 썼다.
갑작스런 난실의 속삭임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예림이 난실을 째려봤지만 난실은 태연한 얼굴로 왜? 라는 제스쳐를 취해보일 뿐이었다.
그런 난실의 모습에 예림은 낮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자- 라고 말했다.

먼저 분장실을 나선 예림의 뒤를 따라 나온 난실은 분장실 앞에 있던 두 남자가 자신과 예림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흘끗 보더니 예림의 옆에 더 가까이 붙었다.
예림은 그런 난실을 보며 피식 웃고는 가게 직원들도 잘 안 다니는 복도로 그녀를 이끌었다.

"하여간... 알았어. 그럼 나 먼저 집에 들어가 있을게?"
"응. 이따가 봐."

난실을 데리고 가게 뒷문으로 나온 예림이 구락부 소속 인력거를 불러 난실을 보내며 손을 흔들었다.
난실은 그런 예림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새벽의 안개 낀 골목길로 인력거를 탄 채 사라졌다.
사라지는 인력거의 뒷모습을 보던 예림이 곁에 다가온 빵 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에게 봉투를 하나 건넸다.
소년은 예림에게 꾸벅하고 인사를 건네더니 들고 있던 신문을 하나 건네고 사라졌다.
예림은 손에 들린 신문을 흘끗 보더니 숄 안주머니에 깊이 넣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뒷문으로 들어섰다.

예림이 들어서자마자 남자들이 뒷문을 막듯 온갖 상자들을 쌓았다.
그 소란스런 소리를 들으며 예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구락부 안으로 들어갔다.
구락부를 한 번 돌아보고 직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린 뒤 태연한 걸음으로 구락부의 가장 위층, 제일 안쪽 방에 도달한 예림은 천천히 무너지듯 문에 기대 앉았다.

떨려오는 손으로 끼고 있던 하늘하늘한 레이스 장갑을 벗고 숄 안쪽에 넣어둔 신문을 꺼낸 예림은 천천히 펼쳤다.
히라가나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신문이 예림의 손 안에서 펼쳐졌다.
그러나 예림은 한글로 된 신문의 내용을 읽지 않고 초조한 손길로 한장, 한장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4번째 장을 넘기는 순간 그 안에 끼워져 있던 작은 종이가 예림의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예림이 침을 삼켰고 떨리는 손길로 그것을 펼쳤다.

'일주일 뒤 술시 초, 극동의 문 앞에서.'

'(七日後 戌時初 極東之門前)'


11글자의 한자를 새기듯 본 예림은 누가 볼 사람도 없건만 그 종이를 들고 일어나 얼른 벽난로의 불 위로 던졌다.
종이가 완전히 타들어가 재가 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예림은 펼쳐둔 신문의 대략적인 기사들을 눈으로 훑듯 읽고는 도로 접어 숄의 안쪽에 넣었다.
숄에서 신문이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실로 꿰맨 후에 예림이는 책상의 서랍을 뒤적여 몇 개의 물건을 꺼내 핸드백에 넣었다.
금고에 있던 돈 일부를 꺼내 역시 핸드백에 넣고 다시 벗어뒀던 장갑을 꼈다.
핸드백을 들고 예림이 방을 나설 때쯤엔 구락부도 영업을 마치고 뒷정리를 끝낸 시각이었다.
가게 현황을 쭉 둘러보며 관리자급 직원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나서 예림은 구락부를 나서서 자가용에 올라탔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달리는 차가 흔들리는 대로 가만히 흔들리는 예림의 표정은 장마철 하늘 마냥 꿉꿉하기 그지 없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 예림의 눈동자는 걱정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Posted by 설하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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